팬티가 찢어졌다.
구멍나고 찢어지지 않는 한 굳이 팬티를 바꿔야할 이유도 없는 기혼 유부남이었기에
그렇게 팬티는 철저히 속옷의 본래 목적에 맞게 잘 사용되고 있었다.
팬티는 원래 6장~ 7장을 산다. 대략 1주일에 1번은 빨래를 하니까. 그러니까 하루 1장의 팬티를 소비한다 치고. 그리고 어쩌다가 2일을 입을 수도 있는 일이니, 일주일 7장의 팬티보다 6장의 팬티는 꽤 reasonable하고도 위트있는 갯수의 팬티 였다. 약간의 긴장감을 주는 숫자라. 그런 위기감에 더 집안일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중의적인 숫자였다.
6장의 팬티를 사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제주여행을 갔다. 어떤 에어비앤비 숙소였는데. 팬티를 침대위에 벗어놓고서는, 매일아침 이부정리가 루틴인 부주의한 아내의 루틴에 팬티는 덮여졌다. 그렇게 1장의 빨강 팬티는 시트와 이불사이에 갇혀 캐리어로 복귀하지 못하고 낙오되어 버렸다.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린 사정을 이렇게나 자세히도 말할 수 있게 난 그 잃어버린 팬티에 대해 묵상을 많이 했었다. 이리하여 나는 6장에서 5장의 팬티로 나는 살아왔다. 약간의 위태로운 5장 팬티의 삶.
두 딸이 태어난 이후로. 우리집 세탁기는 매일매일 세탁물을 끝없이 먹고 뱉어냈다. 정말이지 매일 세탁기 속으로 빨래가 들어갔고, 매일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 수고로이 다시 접어 다시 서랍에 넣어야만 살 수 가 있었다. 빨래 개는 일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곱게 개어진 빨래가 하루도 안가서 다시 땀과 오물을 뒤집어 쓰고 다시 세탁/건조되어 이렇게 해벌래 나와 있을 터인데. '다시 무엇을 기대하며 나는 이 팬티를 접어야 하는 것일까' 아무튼 의미 없는 빨래개기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가사 중 하나였다. 아내는 빨래개기를 좀 더 좋아했는데, 멀티 태스킹이 가능했기에 갤럭시탭에 무한도전을 틀어놓고서는 2시간을 딱딱한 방바닥과 옷방에 박혀 있기도 했다.
'매일 빨래 1번'의 삶은 5장의 팬티의 생태계에도 영향을 준다. 5장의 팬티의 생태계는 LIFO (Last In First Out)구조다. 나중에 들어간 팬티가 맨 위에 있기 마련이고. 무심한 유부남은 손에 닿는 맨위 팬티만 꺼내 입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팬티는 1~2일만에 다시 서랍 맨위에 놓여지고, 높은 확률도 다시 선택되어 출정한다. 5장의 팬티지만 실제로는 1~2장의 팬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파란색을 좋아한다. 이 작은 기호의 차이에서 파란색 팬티는 치명적인 픽업률에 의해 삭아 찢어져 버렸다.
삭아서 구멍이 뚫린 팬티는 모두 같은 부위가 찢어졌다. 파랑색 팬티는 유달리 그 정도가 심했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팬티가 찢어졌다며 demonstration 을 위해 구멍을 벌려 보여주다가 아예 입을 수도 없는 수준으로 찢어져 버렸다. 그렇게 신나게 팬티를 찢었다.
팬티는 복지몰에서 사야한다. 복지몰의 상품은 업데이트를 기다려야 한다. 사실 팬태에 구멍은 예전에 났던 것 같다. 팬티가 조금 찢어졌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 복지몰에서 사겠다는 결정을 내린 이후로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아디다스 팬티가 들어올 때까지 조금 찢어진 그 몇장의 아다디스 팬티를 돌려입으며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약 n달만에 아디다스 팬티가 입고되어. 드디어 팬티를 바꿀 수 있었다. 팬티가 온 날 나는 남은 옛 아디다스 팬티와 10년이 다되어 가는 여름용 속옷 에어리즘과. 가을/겨울용 속옷을 다 버리기로 했다.
에어리즘 속옷엔 또 기억이 하나 연결되어 있다.
2018년 비트코인과 알트코인이 우리의 노동의지를 가져갔을때 씨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언젠가 익절을 하는 날 속옷을 다 바꿔야지' 라고 다짐했던게 기억이 난다. 코인농사는 망했지만 그 다짐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아쉽게도 익절 하기 전에 속옷을 버렸다. 부디 이번 FW 시즌전 익절이 내게 다가 와 속옷을 선물해 주길 바래본다.